LEE Ufan
대한민국의 미술가이자 평론가. 일본의 예술운동인 모노파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이우환이 미술계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모노파 운동이었는데, 이우환은 1969년 모노파의 대표적인 작가 세키네 노부오를 다룬 평론인 '존재와 무를 넘어서'를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후 모노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1971년에는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를 출간해 한국 미술계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모노파 운동은 물체 그 자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거기서 미학적인 면을 발견하는 일본의 미술운동을 말한다. 나무, 돌, 점토, 철판, 종이 등의 소재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그 자체로 작품에 등장시켜 이를 예술로 제시했다. 대개 몇 가지 재료들의 조합의 구성하는 '관계'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거나, 그 재료와 재료를 바라보는 관찰자와의 '만남'에서 의미를 찾는다. 작품 특성상 회화보다는 조각이나 설치예술 부분에서 더 영향력이 있다.
커다란 방에 큰 캔버스가 걸려있고 그 화면에는 큰 점이 하나 혹은 두 개가 찍혀있다.
이를 감상하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느끼고 감동하거나, 분위기에 영감을 받는 사람이 있고, 딱히 별다른 감흥이 없는 사람도 있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어느 쪽이 맞고 틀리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사실 작가의 의도는 그 공간에서 자기의 작품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작품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자체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보통의 미술 감상이란 작품만을 보는 것이 우리의 오랜 고정관념이다. 이런 시각으로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면 뻔하게 느껴지기가 쉽다.
작가의 조각 작품을 보면 돌덩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거나, 벽에 커다란 철판이 기대어져 있고 그 앞에 철판 위에 놓인 돌이 있는 작품이 있다. 긴장된 침묵 속에서 그 공간에 서 있으면 분위기에 압도되어 많은 영감을 얻는 관람객이 있는 반면, 그저 돌과 철판만이 있는 공간을 외면 하는 이도 있다.
오래전 작가가 겪은 일화가 있다. 일본 전시 중에 작가의 전시회를 보러온 노부부가 있었는데. 노부부가 안내원에게 그림과 조각이 어딨느냐고 묻자 안내원은 큰 화면에 찍힌 점과 철판 앞의 돌덩이를 그림과 조각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노부부는 이런 것들 말고 그림, 조각은 어딨느냐고 되물었다. 작가가 옆에서 듣고 있으니 그 노부부가 원했던 것은 일반적인 미술 작품과 조각이었는데, 그들의 기준에서 볼 때 작가의 작품은 그림과 조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리를 벗어나 생각해보니 오랜 시간 동안 ‘미술 작품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상식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작가의 작품은 맞지 않았던 것이고, 그들에게 작가의 작품은 영감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참 어려운 문제라는 걸 느꼈다고 한다.
회화 작품의 바탕이 되는 캔버스를 준비하는데 작가는 특수제작한 캔버스를 사용한다. 벽에 맞물릴 수 있는 튼튼한 캔버스가 필요하기 때문인데, 흰색안료가 4~5회 두껍게 발린 캔버스이다. 물감도 작가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다양한 재료를 배합하여 만들어 놓는다. 붓도 일반적인 붓이 아닌 작가가 따로 제작한 다양한 크기의 붓을 이용한다.
그 다음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들고 고심한다. 텅 빈 공간에 점 하나를 찍어야 하는데, 점 하나와 텅 빈 공간이 맞물리고, 상호작용으로 긴장감이 느껴져야 한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구도를 찾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연습이나 연구, 작가의 역량을 총동원해야만 한다. 누구에게는 간단하게 보이는 점 하나는, 60, 70, 80년대를 거치며 오랜 시간 고민과 연구를 거듭하며 만들어진 점이다.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흰 캔버스와 붓 자국을 어떻게 풀어낼지는 아직도 늘 큰 노력과 고민이 있어야 하는 작업이다.
점이 하나만 있을 때가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캔버스 한가운데에 점을 찍으면 안정적인 대신 동적인 느낌이 없다. 공간의 중심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역사상의 동양화나 서양화를 보면 중심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서 중심으로 흘러가는 구도이다. 사람의 눈은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것을 중앙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작용이 생긴다. 그래서 공간의 중심으로 흘러가는 방향을 찾고 그 길 위에 점을 찍어야 한다. 점의 크기나 위치뿐만 아니라 물감의 종류나 붓 자국에 따라서 점을 찍을 수 있는 위치는 달라진다.
점의 크기나 위치, 형태 등 모든 것이 흰 캔버스와의 관계에서 어떤 긴장감과 분위기를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은 그림을 그리기 전이나 그린 후에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그렇기에 좀 더 고민하고 작품을 그려내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더 좋은 작품이 태어나는 듯하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것이 작가의 방향이다. 덜 그린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화가들은 캔버스를 가득 채워 그린다. 하지만 이우환 작가는 극히 일부분만 터치하고 나머지 공간은 그대로 둔다. 여백을 인정하고 그냥 두면서 일부분만 신뢰한다. 그려진 부분과 그려지지 않은 여백을 어떻게 조합할지가 핵심이다.
일반적인 미술의 관점에서는 그려진 것만이 그림으로 인정되고 그려지지 않은 것은 그림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 어떠한 대상을 만드는 것이 조각의 기본이다. 서양의 조각 sculpture는 깎아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으고 형상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작가는 1960년대부터 조각을 시작했다. 다만 만드는 것으로 여겨지던 조각을 덜 만드는 작업이다. 사물 자체에 최소한의 의미를 부여하고 표현도 최소화한다. 사물과 사물, 사물과 공간 등의 관계를 강조하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직접 제시한다. ‘만드는 것’으로 여겨지던 조각을 덜 만듦으로써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다양한 소재들을 많이 사용해봤지만, 작가는 철과 돌로 소재를 좁혔다. 철과 돌에 대한 연관성을 작가는 부자간이라고 말한다. 기본은 돌이다. 자연의 대표적인 자연물을 돌로 기준 삼았다. 작은 돌멩이라도 엄청난 시간을 품은 덩어리라 볼 수 있고, 그런 시간의 덩어리들이 뭉쳐져 거대한 자연을 이루게 된 것이다. 돌에서 뽑아낸 물질을 산업화한 산물은 철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의 핵심 요 소인 철 역시 자연에서 온 것이다. 자연과 산업사회의 조화를 나타내기에 돌과 철을 관계 짓는 것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돌과 철만 있으면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재가 품고 있는 상징과 기능을 살릴 수 있느냐는 작가의 역량에 달린 것이다. 철공소에 있던 근사해 보이는 철판도 들판에 있던 돌도 전시 공간에 막상 가져오면 볼품없어 보이기도 한다. 돌과 철판을 다양하게 배치하는 과정에서 돌과 철판이 제자리를 찾아갈 때 묘하게 공간은 공기의 흐름도 바뀌게 되고 그럴듯한 느낌이 나오게 된다. 그제야 왜소하게 보이던 돌도 철판도 근사하게 보이는 것이다. 일반적인 돌이나 철판을 작품으로 보이게 만들고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까지가 작가의 sculpture이다.
작가는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며 표현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작품활동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호기심이 많고 사색을 즐기며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존재가 예술가이다. 일반적인 상식만으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이 예술가들의 세계이다. 그렇기에 상식을 넘어 밖으로 튀어나오는데 반체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결국 감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술가의 돌발적인 행동이나 발언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예술가들이 주는 신선한 충격은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고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특정 개념으로 모든 것이 지배받는 근대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것들,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현대미술은 출발한다. 만든다는 근대주의적 개념에서 벗어나, 물감은 물감대로 캔버스는 캔버스대로 벽은 벽대로 모든 물건은 물건대로 사물을 사물 그대로 인정하며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 현대미술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을 볼 때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표현방식이고, 특정한 개념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두고 바라봐야 한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예술도 변화한다. 작가는 시대가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을 가치를 찾고 있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대상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보는 사람마다 다양한 영감을 얻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작가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축소화함으로써 더욱 큰 대화의 장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최소한의 표현으로 더 많은 주변 부분을 끌어들이는 것을 여백으로 삼았다. 남겨둔 부분의 여백이 아닌,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이 부딪혀 일어나는 울림을 여백에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