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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의지(Kunstwollen)의 방향

조각가 박종태는 파쇄한 종이를 이용한 다양한 입체작업으로 인지도가 높은 작가이다. 그는 청년작가시절부터 남다른 시선으로 사물들을 관찰해왔고,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사물들의 구조를 해체하여 또다른 조형적 요소를 드러내는 일에 천착해왔다. 이를테면, 푸른색 양주 유리병을 수건에 싸서 파쇄한 다음, 파쇄된 모양을 그대로 패널에 부착하여 또다른 의미연관(意味聯關)을 보여준 작품이라든가, 철망을 잘게 부수어 그 조각들을 다시 응집해서 만든 원통형 입체 작품, 또는 나무의자나 박스를 부수어 특유의 조형물로 조립한 작품 등, 작가는 사물들의 용도를 박탈하여 재구축하는 과정을 통해 조형의 새로운 깊이와 의미를 추구해왔다.

오늘날 건축분야에서 이미 지어진 건축물의 시멘트 벽을 해체하여 새로운 공간이 드러나게 하는 새로운 경향도 엿볼 수 있듯이, 작가의 예술의지의 방향은 조각가로서 ‘조형물을 만든다’는 기본 행위를 전복시키면서 사물과 구조의 또다른 이면을 드러내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요컨대 이 작가에게 있어 만든다는 행위는 부수는 행위 이후의 재창조라는 문맥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2. 예술매체 확산으로서의 파쇄된 종이지식과 정보의 재구축

작가는 다양한 책들과 문서들을 파쇄기에 넣어 잘게 부순다. 이 중에는 미술관련, 사회과학, 역사 정치학 관련 서적들 뿐 아니라, 문학서적들과 다수의 관공서 서류들 및 일간지와 광고지들도 포함된다. 이처럼 파쇄된 종이들을 먹과 수성물감, 수성접착제를 이용해 패널 위에 일일이 쌓아올린다. 직접 손으로만 작업하기 때문에 손자욱이 들어나기도 하고 그 두께와 요철(凹凸)이 고르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이 또한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말하자면, 손의 사유(思惟)를 통한 마음의 흔적들을 그대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감상자들로 하여금 종이의 지층(地層)에 쌓인 작가의 노동과 정신의 질량(質量)을 음미케함으로써 선적(禪的) 평정심(平靜心)으로 유도하고자 하는 의도도 내재해 있다. 작가 자신이 작업을 통해 쌓아간 수행의 노정만큼 감상자에게도 직관될 수 있는 것이 작품의 세계이다. 이같은 종이 작업의 초기작품으로는 도서관의 폐기 서적을 오브제로 하여, 그 위에 파쇄된 종이들을 쌓아놓은 작품도 있고, 또한편 책 판을 여러 겹 겹쳐놓은 위에 홈을 파고, 그 위에 새싹이 올라오는 모양으로 형상화한 작품도 눈에 띈다. 책 판 위의 새싹은 폐기된 지식을 거름으로 하여 다시 피어나는 또다른 희망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는 예술매체와 공간의 다양한 변용을 통해 지식과 정보의 해체와 재구축을 시도한다.

오늘날과 같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시대, 인간은 오히려 파편화된 정신과 소외, 그리고 불확실성과 불안의 시대정신 속에 표류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의식을 표출한 것이 높이 1미터 30센티 크기의 중앙공간 설치작업이다. 됫박과 같은 상자 속에서 파편화된 지식과 의식의 파편들이 재처럼 바닥으로 쏟아져내리는 작품인데, 파쇄종이를 석고와 수성 바인더로 고착시켜 먹으로 채색한 것이다. 이같은 작업의 프로세스를 음미하면서 벽면의 작품들을 감상하면 이해의 문맥이 보다 선명해진다. 얼핏보면 단색조의 미니멀한 작품들처럼 보이지만, 실은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고, 그 의미연관도 깊어진다. 평면에 가까운 색면의 톤과 요철의 질량감, 촉각적인 매스와 매체의 형태적 환원 등의 조형적인 변용을 넘어 파쇄종이들의 집적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숫자나 기호와 글씨의 파편들이 텍스트의 일부를 암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작품들은 현실의 삶과 관계된 다양한 암호들의 파편으로 가득 차 있다.